‘걸어도 걸어도’, 산다는 건 [유진모의 필로무비]

칼럼 2022. 03.10(목)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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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유진모 칼럼] ‘걸어도 걸어도’(2008)는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가족을 소재로 한 걸작 중에서도 마스터피스이다. 은퇴한 의사 쿄헤이와 아내 토시코는 10년 전 소년 요시오를 구하고 대신 익사한 장남 준페이를 잊지 못한 채 산다. 고인의 기일을 맞아 딸 지나미 가족과 차남 료타 가족이 집에 온다.

지나미는 이 집에 딸린 병원을 개조해 남편과 두 자식과 함께 살고자 한다. 쿄헤이는 준페이 대신 료타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림 ‘의사’(복원사)가 되었다. 그는 전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 아츠시를 키우는 유카리와 결혼했다. 부모에게 숨겼지만 실직 상태. 이래저래 부모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이렇게 모인 가족은 저마다 동상이몽이다. 쿄헤이는 모든 게 불만스럽다. 토시코는 지나미에게 다정하지만 속내는 다르다. 부부는 료타가 장남 노릇을 해 주기를 바라지만 그는 생각이 없다. 료타의 결혼을 독촉했던 토시코는 유카리를 선택한 게 불만이다. 친손자를 원하지만 그게 옳은지 판단이 안 선다.

지나미는 오로지 이 집에 입주하는 게 목표이다. 그녀의 남편은 눈치만 살핀다. 료타는 불편하다. 유카리는 ‘억지 춘향’ 노릇을 한다. 아츠시의 마음은 아직 료타의 가족이 아니다. 지나미의 가족이 떠나고, 료타의 가족은 하룻밤을 잔다. 그리고 쿄헤이와 토시코는 아츠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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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이지만 마치 우리나라 영화를 보는 듯하다. 쿄헤이는 두 아들 중 한 명이 의사가 되기를 바랐는데 그렇지 않자 자식들과 소원해졌다. 아내에게는 권위적이다. 토시코도 보수적이기는 마찬가지. ‘중고’ 아내를 선택한 료타가 밉다. 유카리가 술을 마시자 “여자는 술잔만 받는다.”라며 눈을 흘긴다.

이런 일상이 바로 인생이다. 감독은 우리가 겪었거나 목격했을 법한 생각과 행동 등을 통해 가족의 이야기와 각자의 인생을 펼쳐 낸다. 심지어 음향 효과는 살짝 애잔하면서도 다소 공허한,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의 아르페지오가 전부.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는 크게 3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요시오.

10년째 준페이의 기일에 찾아와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시하는 요시오가 불쌍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한 료타는 엄마에게 “이제 그만 놓아주자.”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증오할 상대가 없는 만큼 더 괴로운 거야. 그러니 저 아이한테 1년에 한 번쯤 고통 준다고 해서 벌 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대답.

또한 그녀는 “넌 네 자식이 없어서 부모 마음을 몰라.”라고 말하기도. 아무리 착하고 훌륭한 부모일지라도 자식 문제에 있어서는 모두 이기적이다. 다음은 지나미 가족이 떠난 뒤의 저녁 식사 시퀀스. 좋아하는 음악 이야기가 나오자 토시코는 이시다 마유미의 ‘Blue Light Yokohama’(1968)를 틀게 한다.

그러면서 오래전 남편의 불륜 상대 이름을 거론하며 “료타를 등에 업고 그 여자의 집을 찾아갔더니 당신 목소리와 함께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라고 읊조린다. ‘걸어도 걸어도’(아루이테모, 아루이테모)는 이 노래 후렴구 가사. 토시코의 쿄헤이와 요시오에 대한 이 엄청난 속사정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건 그녀가 엄마이기 때문이다. 내연녀의 집에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만 하더라도 남편과 여자에게 험한 말과 행동을 할 생각이었지만 노래의 멜로디 혹은 가사 때문에 그냥 돌아왔다. 그런데 그건 핑계일 따름이다. 세 자녀를 제대로 키우기 위한 가장 현명한 방법은 자신의 인내라고 결심한 것.

또한 요시오를 그렇게 고문하는 건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위의 악독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해야 그나마 분을 삭이고, 고통을 줄일 수 있는 것. 이는 도덕적 회의주의, 혹은 윤리적 상대주의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요시오를 괴롭힘으로써 카타르시스까지 얻는 건 부도덕하다.

그건 보편적으로 객관적인데 심지어 어떤 개체에게 있어서는 주관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토시코와 쿄헤이의 입장(부모)으로 봤을 때는 어떠할까? 자신을 살려 준 고마운 은인을 위해 1년에 하루 정도 괴로운 것은 결코 괴로워할 게 아니지 않을까? 역지사지라는 윤리적 상대주의가 적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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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나비. 뜨거운 한낮에 토시코는 준페이의 묘비에 물을 뿌려 줬다. 가족들은 그 위를 나는 나비를 봤다. 밤에 토시코는 방 안에 들어온 나비를 보고 준페이라며 울부짖는다. 그러자 나머지 가족들은 “그만 해.”라며 말린다. 무신론자에게 신, 영혼, 귀신, 사후 세계 등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그러나 특정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종교, 신비주의, 관념론 등은 유물론이나 유명론적 시각에서 보았을 때는 허망하지만 분명히 장점이 있기에 엄존하는 것이다. 토시코는 준페이를 잊지 못해 괴롭다. 하지만 나비를 보는 순간만큼은 반갑고 기쁘다.

묘비에 물을 뿌렸다고 무덤 속 준페이의 시신이 시원하다고 느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유카리는 아츠시에게 “죽었다고 없어지는 건 아냐. 그러니 아빠도 네 안에 절반이 있다.”라고 가르친다. “현존재는 죽음으로써 도래적 존재자가 되어 본래적 존재자로 되돌아간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다.

본래적 존재는 개체가 육체를 얻기 전의 영혼. 현존재는 속세에 육체를 지니고 육화한 존재자. 도래적 존재는 죽은 뒤 본래의 영으로 되돌아간 혼. 사르트르는 즉자(사물 존재)와 대자(의식, 자유)로 구분했다. 세상에는 신령하지만 선연한 현상도 있기 마련. 그렇게 믿고 싶거나. 수년 후 료타는 부모의 묘비에 물을 뿌린다.

[유진모 칼럼 / 사진=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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