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허무주의자” ‘소년들’ 정지영 감독의 비전 [인터뷰]

인터뷰 2023. 10.27(금)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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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 정지영 감독 인터뷰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언제까지 영화를 만들고 싶냐고요? 관객들이 ‘정지영’을 외면할 때까지”

어느덧 영화감독 데뷔 40주년을 맞이한 정지영 감독이 17번째 작품으로 관객들과 만날 채비를 마쳤다. 이른바 ‘재심사건’으로 유명한, 1999년 전북 완주군에서 발생했던 삼례나라슈퍼 사건을 바탕으로 한 ‘소년들’을 ‘블랙머니’ 이후 4년 만에 세상 밖으로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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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나라슈퍼 사건, ‘소년들’로 재구성되다

정지영 감독은 과거 잘못된 수사와 판결로 인해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이 많은 현실에 이와 같은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삼례나라슈퍼 사건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된 사건의 전말을 관객들이 몰입해 들여다볼 수 있도록 정의롭고, 열정적인 형사 황반장 인물을 설정하고, 2000년 재수사 과정과 2016년 재심 과정을 점층적으로 배치하는 구성을 택했다.

“처음엔 약촌오거리 사건을 하고 싶어 박준영 변호사에게 전화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이미 준비하고 있다더라고요. 이후 삼례나라슈퍼 사건을 알게 됐고, 약촌오거리 사건 보다 더 이야기가 깊고, 넓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삼례나라슈퍼 사건은 영화를 끌어나갈 수 있는 주인공이 없어요. 사실대로, 원래대로 이 이야기를 적용해간다면 관객들이 따라가기 힘들고, 복잡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약촌오거리 사건에서 활약한 황반장을 빌려와 일관성 있게 끌고 가자 싶었어요.”

영화의 가제는 ‘고발’이었다. 시나리오 과정에서 ‘소년들’이 언급됐고, 현재의 제목으로 바뀌게 됐다.

“가제를 ‘고발’로 시작했다가 시나리오 쓰는 과정에서 ‘소년들’이 어떠냐는 말이 나왔어요. 거기서 딱 왔죠. ‘소년들’을 제목으로 붙인 이유는 우리가 못배우고, 가난한 소년들이 소외되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황반장 캐릭터로 고발영화처럼 됐지만 두 가지 다 이 영화가 노리는 것이라 크게 상관하진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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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극 3부작, 외면해선 안 될 이야기

6.25 전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통찰한 ‘남부군’(1990),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내면이 파괴된 참전 용사의 삶과 전쟁의 폐해를 고발한 ‘하얀 전쟁’(1992)을 비롯해 2007년 석궁 테러 사건을 조명한 법정 실화극 ‘부러진 화살’(2012), 2003년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파헤치는 금융 범죄 실화극 ‘블랙머니’(2019)까지 정지영 감독은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작품을 선보여 왔다. 그가 ‘실화’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를 만드는 것, 소설을 쓴다는 건 우리 삶을 반영하는 거예요. 픽션으로 하는 이야기보다 훨씬 더 사실 속에서 절실하고, 진지하게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소재들이 많죠. 가슴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또 정지영이란 사람의 관심 자체가 인간과 사회의 관계,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왜 살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등에 관심이 많아요.”

1982년 영화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를 시작으로 정지영 감독은 올해 영화감독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지난 9월 서울 아트나인에서는 ‘정지영 감독 40주년 회고전’이 열렸고, 10월 영국에서 개막한 제8회 런던 아시아영화제에서도 그의 40주년 회고전이 개최됐다. 정지영 감독은 영화감독으로 걸어온 지난 40년을 되돌아보며 의미를 되새겼다.

“40주년이라고 해서 행사도 만드니 돌아보게 되네요. 하하. 저는 개인적으로 ‘허무주의자’에요. 영화를 통해 비전을 찾아가죠. ‘부러진 화살’도 재판에서 졌어요. 그런데 캐릭터를 승리한 것처럼 만들었죠. 그런 것처럼 영화에서 비전을 찾아요. 억울하게 당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리면서도 마지막에 비전을 포기하지 않죠. ‘블랙머니’도 마찬가지에요. 그런 걸 통해 극복해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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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40주년, 현재진행형 감독 정지영

영화 연출 외길 40년. 정지영 감독은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직배(직접배급) 영화 저지 투쟁,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 표현의 자유 쟁취 운동, 스크린 독과점 및 대기업 영화산업 수직계열화 문제 등에 앞장서 왔다. 영화계를 이끌어 오고 있는 ‘현역’으로서 급변하는 극장가와 OTT 환경에 대해서도 진단을 내렸다.

“다양하게 접근했으면 해요. 영화산업이 지속적인 유지를 하려면 다양성이 반드시 중요하죠. 트렌드만 따라가면 관객들은 금방 싫증내요. 예를 들어 관객들이 액션물을 좋아한다고 너도 나도 액션물을 찍는다면 싫증나잖아요. 그러지 말고, 자기가 잘하는 걸 찍자는 거죠. 다양성을 존중하면 영화산업이 유지돼요. 트렌드에 따라 가다 보면 위기가 오죠. 할리우드도 경험해왔던 거예요. 물론, 코로나19 이후 극장 문화가 죽은 것도 있어요. 관람료가 올라 버거워진 것도 있고요. 그럴수록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들을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해야 해요.”

“관객들이 외면할 때까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바란 정지영 감독. 정 감독은 다음 작품으로 제주 4.3 사건과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을 준비 중이다. 영화를 향한 정지영 감독의 열정은 여전히, 아직도 뜨겁다.

“관객들이 ‘정지영’을 외면할 때까지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언제 올지 모른다고 생각해요. 시대가 바뀌면서 감성, 트렌드를 의식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거기에 의식해 저의 테크닉을 바꿀 순 있죠. 그러나 의식한다고 저의 콘텐츠까지 바꿀 순 없어요. 관객들이 ‘정지영 영화는 보기 싫어’라고 하면 끝나는 거죠. 제주 4.3 이야기와 백범 김구 암살 사건 두 개를 준비 중인데 제주 4.3 사건 같은 경우, 투자자들이 안 좋아하는 이야기라 여러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요. 영화를 좀 더 관객과 쉽게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셀럽미디어 전예슬 기자 news@fashionmk.co.kr / 사진=CJ EN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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